박상우 고간

광안리 다시 품기

레무리안2021-06-20

참으로 오랜만에 부산 나들이를 했습니다. 출발할 때 수도권의 날씨는 한껏 청명했는데 부산에 도착하니 태풍급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주어진 시간이 아까워 송정과 청사포를 거쳐 밤에 숙소가 있는 광안리에 당도하여 바다 곁에서 맥주를 마셨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맑고 환한 광안리를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동안 숱하게 봐왔던 광안리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광안리가 되어 나의 품에 안기는 걸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숨어 있기 좋은 곳, 내다보기 좋은 궁창의 광경, 그 모든 것들이 나와...

밤의 정령

레무리안2021-05-10

새벽 두 시 이십분 경, 민트가 거실에서 매우 특이하고 절박하게 우는 소리를 내고 있어 놀란 심정으로 자다 깨어 나가보았습니다. 녀석이 거실의 한곳을 주시하며 한껏 깊어진 바이브레이션으로 두려움이 섞인 괴이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휴대폰으로 그곳을 향해 몇 장의 사진을 찍었더니 이렇게 안개처럼 부연 기운이 일정 부분에 뒤덮여 있었고 첫번째 사진 이후에는 정상적인 피사체로 모든 구조물이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날이 슬슬 무더워지고 납량특집의 계절이 가까워지니 그저 심심풀이 땅콩삼아 상상력 부풀리는 소...

봄빛, 봄볕을 찾아서

레무리안2021-03-31

4월부터 바쁜 스케줄이 시작될 예정이라 긴장하고 있던 터, 봄빛과 봄볕을 만끽할 기회가 생겨 충북 괴산호 주변의 산막이옛길을 트레킹하고 왔습니다. 산막이마을까지 트레킹하고 돌아나올 때는 유람선을 이용해 산길과 물길을 두루 섭렵하며 연둣빛, 녹빛, 진달래, 벚꽃을 보며 지난 겨울의 마음잔재를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 무렵에만 잠시 볼 수 있는 봄빛과 봄볕, 좋은 세상 몰고오는 전령사가 되기를 간절히 빌어 봅니다.

문도선행록

레무리안2021-03-11

2020년 11월 장편소설 『운명게임』을 출간한 이후 4개월, 그동안 집필 때문에 쌓아두었던 책들을 몰아 읽느라 책벌레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대부분 재미없는 책들이었는데 그 와중에 우연하게 기회가 닿아 사진작가이자 행위예술가, 화가인 김미루의 사진산문집을 접했습니다. 도(道)를 물어 선(禪)을 향해 간 기록, 『문도선행록(問道禪行錄)』. 658쪽의 방대한 분량에 사막에서 몸으로 예술한 그녀의 기록이 소름 돋게 옮겨져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책에 저장된 치밀하고 치열한 사막 기록이 저의 사막 경험에 겹쳐져 그동안 해결...

설천봉 메모리

레무리안2021-03-07

2월 말경 무주에 다녀오고 어느덧 열흘. 3월의 첫 일요일을 맞이하여 메인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였습니다. 해발 1,614m의 향적봉에서 주변의 산세를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이 꽤 많았는데 제가 원하는 느낌의 사진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2월의 썰렁한 산빛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산을 찍었는데 산의 느낌이 안 난다는 건 제 기억 속에 각인된 어떤 이미지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사목을 초점으로 시원스럽게 열린 시계(視界)를 찾는 일인데 엉뚱하게도 해발 1,520m의 설천봉으로 내려와 고사목과 스키어를 함께 찍은 한 장...

무주

레무리안2021-02-26

해발 1,614m 무주 덕유산 향적봉에 참으로 오랜만에 올랐습니다. 대학시절, 등산로를 따라 향적봉까지 올라가느라 엄청 힘들어했던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데 그곳은 이제 스키어들을 위한 곤돌라와 리프트 시설이 들어서 고사목 지대의 낯선 풍경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스키를 탈 수 있는 마지막 주간이라 평일인데도 사람이 많았고 눈은 오직 슬로프에만 남아 성큼 다가온 봄기운이 정상에서도 완연하게 느껴졌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금강변에서 어탕국수와 도리도리뱅뱅이라는 것을 먹었는데 여행길에 우정 맛집을 찾아...

별의 사인

레무리안2021-01-29

해발 1,100m의 하이원리조트에서 찍은 별 사진입니다. 지대가 높고 공기가 맑아 밤하늘 별밭이 장관이었는데 개중 가장 밝은 별을 향하여 24-105렌즈를 한껏 당겨 보았습니다. 그렇게 여러 장의 사진을 찍는 와중에 빛의 궤적이 찍힐까 싶어 카메라를 의도적으로 흔들었는데 마치 별이 사인을 한 것같은 사진이 찍혔습니다. 무한대공에 아로새겨진 멋진 별의 사인, 보면 볼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사진입니다.

시공간 짜깁기

b6122021-01-04

지난 연말 어느 날 강화도에 갔었습니다. 강화도, 석모도는 제가 사는 일산에서 멀지 않아 심심찮게 다녀오곤 했는데 신기하게도 조양방직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가 본 적이 없는 게 아니라 그렇게 특이한 공간이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그날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다 알게 되어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1933년 일제 치하에서 만들어진 방직공장이 폐업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2018년에 리모델링해 우리가 지나온 과거를 경험하는 카페로 꾸며졌다고 합니다. 드넓은 시공간을 한바퀴 돌고나면 1930년대...

인연의 힘으로

레무리안2020-12-26

얼마 전, 수오서제라는 출판사 편집장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 출판사에서 원제스님이 두 권 분량의 세계일주 여행기를 출간했는데 스님께서 소설가 박상우 선생님의 연락처를 알아내 꼭 책을 보내 주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저는 그런 스님을 모르는데 무슨 일인가, 기이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제 주소를 알려주고 원제스님이라는 분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나는 16년만에 기이한 인연의 힘으로 한 제자와 통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스님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기에 저...

장편소설 『운명게임』 출간

레무리안2020-11-17

오랜 산고 끝에 드디어 『운명게임』이 출간되었습니다. 성원해 주신 많은 분들께 두 손 모아 깊은 감사 드립니다. _()_ https://www.yna.co.kr/view/AKR20201118144700005?input=1195m

레무리안2020-09-14

8월 19일 새벽, 해발 1,330m의 함백산 만항재에서 태백산 방면 백두대간 19구간 방향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이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정덕수 시인의 시가 떠올라 그것을 두어 번 되새겨보고 산사진 아래 놓고 갑니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정덕수 시, 「한계령에서」 htt...

바람의 언덕

레무리안2020-09-08

해발 1267m 매봉산 풍경입니다. 팔월 중순경, 무더위가 절정을 이룰 때 태백으로 달려가 맨 처음 매봉산 바람의 언덕에 올랐습니다. 고랭지배추밭으로 유명해 '배추고도'라고도 불리고 풍력발전단지가 있어 웅장한 느낌도 들지만 겨울에는 눈에 뒤덮여 여러 번 시도했음에도 한번도 정상에 오르지 못해 아쉬움을 느끼게 하던 산입니다. 드디어 배추고도 정상에 올라 백두대간을 굽어보며 복더위에도 모처럼 호연지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겨울에 눈에 덮였을 때 다시 한번 정상에 오를 수 있기를!

양들의 비밀

레무리안2020-08-27

칠월말경 대관령 양떼 목장에 갔을 때 해발 900m 능선에 방목된 양떼들에게서 늙고 무관심하게 방치된 슬픔의 에너지를 접하고 몹시 불편한 마음으로 양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분위기로부터 오롯이 자신들만의 내밀한 시간에 집중하는 두 마리 양을 발견했을 때 무척 기쁘고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셔터를 누를 수 있었습니다. 그곳의 양들에게서는 아무런 생기를 느낄 수 없고 권태와 체념과 무관심이 켜켜이 쌓여 있는 듯했는데 이 두 친구는 아마도 그런 문제들에 대해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닌지 불편한 마...

원고와 산고, 그리고 출고

레무리안2020-07-30

2020년 7월 27일 새벽, 오래 부둥켜안고 있던 장편소설 원고를 출판사로 전송했습니다. 연초에 작품을 끝냈으나 코로나19의 환란 시기에 출간을 하기가 부담스러워 6개월 넘게 품고 있으며 일곱 번의 프린트 수정, 두 번의 모니터 수정을 거쳐 도합 이홉 번의 수정작업을 끝으로 드디어 원고가 세상으로 출고 되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작품의 모니터링에 참여해 많은 수정이 이루어지고 애초 세 권으로 쓰여졌던 것이 두 권으로 재구성되고 상세한 '주'가 추가되어 픽션과 넌픽션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메타픽션 기법...

전생의 추억

레무리안2020-07-14

지난 유월 어느날, 코로나19 답답증이 한껏 고조됐을 때 강화도에 가서 점심을 먹고 도솔 미술관에 들러 차를 마시고 왔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 중 오직 한 장을 건져 바탕화면에 두고 기회 있을 때마다 한 번씩 보곤 했습니다. 이 공간에 올리고 싶었지만 마땅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 어느덧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문득 선반에서 책뭉치가 떨어지듯 뜻하지 않은 제목이 떠올라 드디어 사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제목과 사진 사이의 개연성이나 인과성 같은 것, 아마도 저의 무의식 속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