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귀 거북, 살카타 거북

레무리안2016-05-19 

번잡한 호수공원의 꽃박람회가 끝나서 모처럼 햇살 부신 오전에 산책을 나갔습니다. 자연늪지 쪽으로 들어가자 늪지 한가운에 자리한 바위 위에 조각처럼 보이는 거북 떼가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습니다. 햇살이 역광으로 비추는 시간이라 나는 그것들이 조각상인 줄 착각하고 언제 저런 것들을 만들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진을 몇 장 찍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메모리 카드에서 사진을 출력해보니 오호라, 멀쩡하게 살아있는 붉은귀거북이들이 일광욕을 하는 장면이 드러났습니다. ...

On the rooftop

레무리안2016-05-15 

나는 9층 옥상에 서 있습니다. 벽유리에 비친 내 발이 지상의 한옥 지붕을 밟고 서 있습니다. 꿈 속에서 본 장면 같습니다. 겹쳐진 현실, 겹쳐진 장면, 겹쳐진 시공 나는 가끔 우리가 모르는 평행우주라는 게 이와 같은 방식으로 겹쳐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사는 3차원 우주의 에너지 진동이 가장 낮아서  시공이 생성되고 형상이 보이는 것이니 시공을 필요로 하지 않는 더 높은 차원의 우주는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3차원을 에너...

내 사랑

레무리안2016-05-10 

사월의 어느 토요일 밤, 종로 익선동 골목길의 깊은 공간에서 발견한 그림입니다. 그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그가 생각하는 사랑의 이미지가 너무 소박하고 정겹고 또한 아파서 나도 모르게 동작을 멈추고 한동안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민들레를 닮은 꽃과 갈라진 벽의 조화로부터 인생의 온갖, 사랑의 온갖, 이미지가 부풀어올랐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어떤 이미지인가요?   Click on the photo!  

청산을 보다

레무리안2016-04-30 

봄꽃이 만개하고 비가 내리던 날, 산 정상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니 첩첩한 산세가 운무에 덮이고 그 사이로 길이 열려 청산에 드는 풍경을 보았습니다. 흐드러진 봄꽃 사이로 열린 청산의 풍경, 살아 생전 처음 보았습니다.   Click on the photo!  

비, 그리고 주산지

레무리안2016-04-28 

봄비가 내리는 날, 부리나케 차를 몰고 주산지로 달려갔습니다. 안개를 기대했는데 비에 젖은 수목의 푸르름이 반영을 일으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오묘한 무지개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주산지의 가장 유명한 명물, 왕버들입니다. 한껏 푸름을 뽐내는 녀석이 일으키는 반영이 녹빛 아지랑이를 방불케 합니다. 주산지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인공호수라는 걸 알고 나면 도대체 이렇게 깊은 산중에 왜 이런 걸 만들었을까 궁금해지겠죠? 인터넷 검색 요망~^^   Click on the photo! ...

댓글 4

극적 장면

레무리안2016-04-15 

자신이 만든 불기둥을 황급히 피하는 저 아저씨, 저것은 화재가 아니고 작년에 추수하고 남은 작물 줄기를 태우는 장면입니다.  언뜻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보이지만 시골에서는 이런 일이 한 해 농사를 다시 시작하는 봄맞이 행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객주문학관 옥상에서 24-240mm 망원렌즈를 장착해 찍은 사진인데 출력을 해놓고 보니 현장보다 훨씬 드라마틱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불이란 저렇게 물질을 태우는 화염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인간의 내면에도 저렇게 강렬한 화기(火氣)가...

댓글 2

청량대운도

레무리안2016-04-08 

경북 청송에 가면 야송미술관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청량대운도(淸凉大雲圖)'라고 이름 붙여진 초대작 그림이 있습니다. 야송 이원좌(野松 李元佐) 선생이 청량산을 배경으로 가로 46m, 세로 6.7m의 그림을 완성해 그것을 전시하기 위한 별도의 전시관이 마련된 것입니다. 그림이 너무 높고 길고 커서 감상을 위한 이층 전망대까지 마련되어 있으니 직접 그곳에 가서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가히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청량산은 경북 봉화군에 속한 명산으로 산세가 ...

저물녘, 논두렁 밭두렁 산책

레무리안2016-04-06 

월요일에 청송에 내려와 수요일인 오늘까지 머물고 있습니다. 하루종일 책을 읽고 심사할 원고를 읽다가 해질 무렵 창작관 울타리를 벗어나 논두렁 밭두렁 산책을 했습니다. 24-240mm 망원줌 렌즈를 카메라에 달고 나가면 멀리서 밭이랑을 고르거나 쑥을 캐는 아낙네들 모습을 당겨서 잡고 가장 마음에 드는 풍경은 휴대폰으로도 한 장 찍습니다. 오늘은 그루터기만 남은 논에 들어찬 녹조류의 색상에 취해 있었습니다. 밤부터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어서, 실제로 밤 사이 비...

내 마음의 무안불

레무리안2016-03-30 

2015년 봄, 중국 쓰촨성 광원 천불애(中國 四川省 光元 千佛崖)에서 찍은 무안불(無顔佛) 사진입니다. 천불애는 조성된 지 1,500년이 넘는 석굴 문화재로 세월의 먼지가 덮인 아름다운 조각작품들이 바위산 하나를 800여 개의 동굴로 분할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수백 장의 사진을 찍어와 세월의 먼지를 벗겨내는 보정의 시간을 거쳐 이렇게 원색에 가까운 색상을 추출해 내니 금도금의 흔적이 역력하고 마야 블루에 가까운 아름다운 색상까지 떠올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진이 주는 깊은 사색의...

댓글 2

나에게 날리는 하이!

레무리안2016-03-22 

겨울부터 봄까지 『외계인』이라는 장편소설을 쓰면서 오전 열 시경부터 오후 네 시경까지 '설빙'이라는 디저트 카페에서 꽤 여러 날 작업을 했습니다. 그 카페는 이층에 있는데, 오후 네 시경 그곳을 나와 일층으로 내려올 때마다 이층 창유리에 붙어 있는 상호 중 '하이'라는 글자가 오후의 잔광을 받아 일층 벽면에 그림자를 만들곤 했습니다. 그래서 소설을 끝내고 내려오는 마지막 날, 저 하이를 향하여 기분 좋은 하이를 날려주리라 작정했습니다. 나에게 날리는...

내게 너무 조화로운 사각보

레무리안2016-03-16 

인사동에서 오천원을 주고 산 사각보입니다. 가운데 자리잡은 조각문양이 참 조화롭게 어우러져 서재를 오가며 자주 시선을 빼앗기곤 합니다. 커피 한 잔 가격으로 마음의 균형을 찾게 해주는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 '솜씨'는 가격매김을 할 수 없는 무형의 가치라는 생각이 듭니다. 솜씨 좋은 사람이 되어 많은 사람에게 솜씨를 베푸는 인생, 솜씨 중 최고의 솜씨는 무엇보다 마음 솜씨, 다시 말해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솜씨일 것입니다. 솜씨 좋은 사각보를 보며 마음 솜씨를 생각하는 화창...

댓글 4

토요일, 인사동 산책

레무리안2016-03-13 

토요일 오후, 오랜만에 인사동 산책을 했습니다. 사실은 작은 사각보를 하나 살 요량이었는데 그것이 잘 눈에 띄지 않아 아주 천천히 좌우의 기념품 판매점들을 살피며 걸었습니다. 인사동에는 사람의 마음 형상을 닮은 물건들이 참 많습니다. 골동품, 민화, 고전적인 장신구 등등을 느긋하게 구경하며 걷다가 길 한가운데서 경쾌한 풍물놀이패를 만났습니다. 봄을 부르는 듯한 타악기 소리가 너무 흥겨워서 인사동이 아니라 시골집 너른 마당 한 가운데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

Memories of Audrey Hepburn

레무리안2016-03-04 

수요일 밤, 청담동에서 저녁 약속이 있어 외출했습니다. 일식집에서 식사를 하고 편안한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소주를 마셨습니다. 참나무통에서 10년 숙성시켰다는 소주를 두 병 마시는 동안 몇 차례 화장실을 다녀오며 어김없이 화장실 앞의 벽면에 걸린 오드리 헵번의 대형 패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망연자실한 기분,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감성의 스펙트럼 때문에 세월과 기억과 정서가 고스란히 휘발되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뒤 휴대폰 갤러리에 저장된 그녀를 발견하고 포토샵에...

댓글 2

춘설이 난분분하니

레무리안2016-03-01 

일요일, 오전부터 기습적인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겨울 내내 눈다운 눈이 내리지 않더니 봄꽃이 움트는 걸 시샘하는 것처럼 젖은 눈을 쏟아부어 나뭇가지마다 적설을 이루고, 기온이 떨어지니 그것이 설화(雪花)가 되었습니다. 평양기생 매화(梅花)의 시조가 떠오른 것도 다 춘설(春雪) 때문이려니 앞에 앉은 민트와 뒤에 앉은 나는 망연히 눈 내리는 풍경에 동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화 옛등걸에 봄철이 돌아오니 예전 피던 가지에 피엄즉도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

자정 무렵, 나는 자유다

레무리안2016-02-26 

100매 가까운 연재소설 원고를 끝내고 토요일 강의준비도 끝내고 한 주 내내 집중하던 일들로부터 풀려나는 자정 무렵, 곤두선 신경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와인을 마시며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을 듣습니다. 긴장과 초조와 집중으로 점철되었던 의식의 결기들이 해체되어 밤의 드넓은 대공으로 빨려들어가는 게 녹록하게 느껴집니다. 산다는 것은 노동과 휴식, 긴장과 이완의 되풀이 떠남과 돌아옴, 만남과 헤어짐의 되풀이 희망과 절망, 비상과 추락의 되풀이 잠듦과 깨어남, 태어남과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