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우 고간

책사냥 후감

레무리안2024-03-01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담긴 책이 많아져 교보문고에 책사냥을 갔습니다. 목록에 적힌 23권의 책 위치를 검색대에서 찾아 일일이 메모하고 한 권 한 권 찾아다니며 내용을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교보문고인데 근래 나온 책들 중 5권이 <재고 없음>이었고 나머지 18권 중 대부분은 구매 후보에서 탈락해 최종적으로 구매한 책은 단 두 권이었습니다. 과학분야의 서적들도 양자역학 이후 더이상 진전하지 못한 채 과학자들이 철학과 인문학을 대신하려는 시도가 점점 한계를 보이고 있어 날이 갈수록 낯선 소설의 창조력에 관심이...

지중해보다 더 아름다운 빛

레무리안2024-02-09

코로나 시절부터 미뤄오던 의형제 아우를 만나기 위해 2월 6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오전 11시경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너무 오랜만의 해후라 반갑기도 하고 할 얘기도 많아 부산역에서 곧바로 미포로 나가 바다 앞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였습니다. 25년 동안 의형제로 지내온 좋은 술친구이자 아우인 그와 함께 1박 2일 동안 사람 힐링, 풍경 힐링을 하고 돌아오니 오랫동안 막혀 있던 내면의 환풍구가 모두 열린 것 같아 시원합니다. 다음부터는 약속 없이 어느날 오전 갑자기, 어느날 오후 갑자기 서프라이즈 식으로 부산으로 내려가 ...

서순라길, 입춘 하루 전

레무리안2024-02-04

토요일, 입춘 하루 전 날씨가 봄날 같아서 서순라길로 접어들어 천천히 걸었습니다. 고궁 담 너머의 오래된 나무들에 새순이 돋기에는 이른 시기이지만 대기에는 이미 삼삼한 봄기운이 스며 있었습니다. 완연한 봄이 오기까지 몇 차례의 추위가 더 찾아오겠지만 그런 와중에도 땅속과 수목의 줄기 안에서는 봄기운이 움트고 그것들이 머잖아 봄의 전령사가 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마지막에 어브와에 들러 루이보스차를 테이크아웃하고 창조의 기운이 왕동하는 뇌트워크의 세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창조와 사랑, 봄을 부르는 내밀한 명령어...

체감기온 영하 21도의 열기

레무리안2024-01-24

체감기온 영하 21도, 최강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날 오래 전에 약속 잡아둔 음력 망년회를 위해 오전에 집을 나섰습니다. 서울, 부산, 대구, 일산 등지에서 오는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1시간 전쯤 약속장소에 도착해 이디야 커피숍에서 에스프레소 샷을 추가한 뜨겁고 진한 커피를 마셨습니다. 반가운 얼굴들 만나 이베리코에 소주를 곁들여 담소 나누고 분위기 좋고 따뜻한 호프집에서 생맥주를 마시는 동안 어떻게 7시간이 흘러갔는지 아예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상스러움과 잡스러움에 대하여 문학과 인생, 각자의 창작 계획과 한국문...

책을 사냥하는 방식

레무리안2024-01-19

오랜만에 책을 사냥하러 일산 교보문고에 갔습니다. 평상시 인터넷 서점에서 신간검색을 하며 검토 대상이 되는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그것들이 상당 분량 누적되면 한번씩 교보문고에 가서 사냥을 시작합니다. 해당 도서의 위치를 검색으로 찾아 메모하고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전체적 내용을 검토합니다. 그렇게 목록을 다시 추스리는 과정에 여러 권의 대상도서가 탈락하고 마지막까지 구매 대상으로 남는 도서는 몇 권이 되지 않습니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편의성도 있지만 막상 책을 받아들고 읽다보면 내용에 실망하게 되는...

설국에서 설국으로 가는 꿈

레무리안2024-01-07

어제 강의 끝나고 오후 4시부터 작가들 모임이 있었는데 어둠이 내릴 무렵부터 갑자기 폭설이 쏟아져 밤 9시경 밖으로 나왔을 때 마치 러시아의 도시에서 본 것 같은 아름다운 설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날씨가 포근해서 젖은 눈이 내린 탓인데 눈이 쫀닥쫀닥하게 모든 사물에 들러붙어 평상시와는 완전히 다른 설경을 연출했습니다. 토요일이라 익선동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는데 내리는 눈을 보며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한껏 낭만이 충만한 밤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동안 망연하게 서서 도시의 설경을 감상...

설국에서 보낸 하루

레무리안2023-12-31

토요일, 하루종일 폭설이 쏟아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에라도 온 듯한 기분으로 진종일 베란다 앞에 앉아 눈구경을 하다가 날씨가 너무 포근해 눈이 녹아버리는 자정무렵에는 인근 공원에서 멋진 눈사람을 만나 한참 교감하다 돌아왔습니다. 누가 만들어놓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눈사람 표정이 너무 리얼해 저에게 말을 거는 듯한 착각이 일었습니다. 아무려나 멋진 설국에서의 하루였습니다. Happy New Year!

나주, 증강현실, 그리고 소설

레무리안2023-12-21

두어 달 전, 근거를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날아와 난생처음 나주로 가게 하고, '증강현실'이라는 화두를 품게 하더니 그것이 부화에 부화를 거듭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소설을 견디고 견디다 보면 이렇게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도 창작이 강행되는지 근원을 알 수 없는 미스터리만 깊어져갑니다. 아무려나 이렇게 탄생한 소설을 두고 '모든 소설은 이미 다 쓰여져 있다'는 황당한 추리를 하며 이것을 좀더 품고 있다가 2024년 연초에 신년 선물처럼 발표해야겠다고 작정하였습니다. 어떤 연유와 경로로 탄...

긴장과 이완의 상징

레무리안2023-12-11

토요일, 강의를 하러 종로로 갈 때마다 들르는 두 곳의 상징물입니다. 위의 사진은 강의를 하러 가기 전에 들르는 아주 작은 카페, 아래 사진은 강의 끝난 뒤에 들르는 주점입니다. 강의 전에 반드시 카페에 들러 커피를 테이크아웃하고 강의 끝난 뒤에는 주점에 들러 긴장을 이완합니다. 항상 새로운 창작품에 대한 강의를 설계하고 진행하기 때문에 강의 전에는 늘 긴장지수가 최고로조 상승되고 그래서 강의가 끝난 뒤에는 긴장을 이완시키기 위한 해방주가 필요합니다. 편안한 주점에서 천장을 쳐다보며 마시는 소주 한잔, 아주 사소...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종로에서 임진각까지

레무리안2023-11-27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종로에서 임진각까지 이틀 동안 지속된 동선에 따라 포착된 파편적인 장면들입니다. 각인 효과처럼 전체적 흐름 속에서 저절로 돌출되는 장면을 포착하면 그것들 사이의 연계성과 연속성은 소멸되고 종로에서 임진각까지의 시공간도 연결고리를 상실합니다. 이윽고 내가 무엇을 위해 종로에서 임진각까지 이동했는지 개별적 존재성도 이이없이 휘발되어버립니다. 의식적으로 커팅된 장면들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드는 일,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곰곰 되새겨보는 시간입니다. 입자와 파동, 운동량과 위치 사이...

다시 나주에 가기 위하여

레무리안2023-11-17

난생처음 나주에 다녀왔습니다. 본의와 다른 청탁 건으로 강제 지정된 도시가 나주였는데 청탁을 거절하려다 잠시 멈칫, 나주가 나에게 배정된 숨겨진 이유가 있다는 직감이 작동했습니다. 결국, 나주에 대한 화두 하나를 품고 그곳으로 갔는데 그 화두가 바로 '증강현실'이었습니다. 실제로 나주에 입성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J가 '재이'가 되고 남자가 여자가 되는 걸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그 현상은 밤이 되고 날이 밝은 뒤에도 더욱 증강되어 오호라, 쾌재! 나는 나주에 낚이고 나주는 나에게 가슴 설레는 ...

서사 없는 시공간 이동

레무리안2023-11-06

11월 3일, 금요일 오전 10시 20분 KTX를 타고 대구로 갔습니다. 오후 3시부터 시작되는 현진건문학상 시상식 참여, 반가운 얼굴들 만나 담소하고 술 마시며 1박2일의 일정을 보내고 동대구 역에서 돌아오는 기차를 탔습니다. 코로나를 겪으며 생겨난 깊은 단절감 때문에 모처럼 세상으로 나가도 별다른 감흥이 없습니다. 여기나 거기나,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차별과 차이에 대한 수용력이 너무 일반화돼 설렘이 없습니다. 거리두기가 만들어낸 장애, 관조하는 삶의 불행을 되새기며 그래도 꾸역꾸역 다음 여행지를 일정표에 기록하고...

돌담길 가을 소풍

레무리안2023-10-29

10월 28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강의가 시작되는데 오전 11시 30분에 도착해 고궁 돌담길 소풍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사람의 발길이 번잡하지 않을 때, 정오 무렵의 햇살과 돌담길의 정취를 호흡하며 카페의 바깥자리에 앉아 가을을 온전하게 만끽했습니다. 햇살과 가을의 기운이 온몸의 세포로 스며드는 게 느껴지고 참으로 오랜만에 힐링한다는 자각이 저절로 샘솟았습니다. 아지트 커피숍 하나 만들어두고 강의 나갈 때마다 같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기로 했습니다. 아직 서울에 저런 길이 남아 있어 너무 다행입니다.

가을 관조

레무리안2023-10-19

Galaxy Note9 이른 새벽, 하늘과 호수 사이 왜가리 한 마리가 새벽바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나무와 왜가리가 물에 비쳐 바라보는 자도 스스로 바라봄을 당하게 됩니다. 다만 바라본다는 것, 다만 되비친다는 것 나를 알기 위해 타자적인 반영을 되새기게 되는 세상, 반영 없는 경지, 나 없는 나의 경지에서 이윽고 사념이 스러지기를! 스바하_()_

<2046> 리마스터링

레무리안2023-10-08

Galaxy Note9 일요일, 모처럼 영화 한 편 볼 생각으로 넷플리스에 접속, 한 시간 이상 볼 만한 영화를 찾다가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 <화영연화>, <중경삼림>, <2046>이 리마스터링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 본 영화들이라 스쳐가려 했는데, 흐릴 대로 흐린 가을날씨 탓인가 <2046>을 스치다가 배경음악인 시크릿 가든의 Adagio에 족쇄가 걸리고 말았습니다. 화면을 멈추고 유튜브로 음악을 들은 뒤 <2046>의 시공간으로 투신! 예전에 볼 때 지루하고 산만한 느낌을 주던 영화였는데 2046이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