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우 고간

풍경 이후

레무리안2024-04-07

사람은 풍경의 일부로 세상에 태어난다. 그뿐만 아니라 풍경의 일부로 세상을 살다가 풍경의 일부로 스러진다. 모든 풍경이 나로부터 출발하니 내가 풍경의 시작이고 끝이다. 내가 나의 풍경에 제대로 눈뜨면 나와 남, 세상과 우주의 풍경이 하나라는 걸 절로 깨치게 된다. 그때가 되면 더는 풍경을 보러 길을 나서지 않아도 된다. 앉은자리에서도 우주 만물의 하나 됨을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본래 그대로

레무리안2024-03-24

흐리고 비 내리는 날은 푸른 하늘과 태양을 볼 수 없다. 하지만 구름이 가렸다고 해서 하늘과 태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본래 그대로 변함이 없다. 잠시 잠깐의 변화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치밀었다 가라앉고 밀려왔다 밀려갈 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완전하다. 하늘처럼 맑은 상태로 항상 변함없이 머무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날마다 오감이 만들어내는 자기 망상에 휘둘리며 푸념한다. 괴롭다, 슬프다, 힘들다, 지겹다, 죽고 싶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날씨...

안으로의 여행, 밖으로의 여행

레무리안2024-02-19

여행은 ‘안’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는 행위이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역시 ‘안’이다. 그때의 ‘안’은 삶의 터전이 아니라 정신적 근원으로서의 ‘안’이다. 밖으로 나가 밖으로만 떠돌다 돌아온 사람에게 ‘안’은 권태와 타성의 지옥으로 비친다. 그래서 진정한 내적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는 여행은 후유증과 부적응을 낳고 또 다른 일상 탈출을 불러온다. 여행이 아니라 습관적인 현실 도피증을 낳는 것이다.

출판권자와 저작권자의 영역

레무리안2024-01-31

부모는 책을 출판한 출판권자이지 그것을 집필한 저작권자가 아니다. 하지만 대개의 부모는 자신이 출판권자인 동시에 저작권자라고 잘못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의 고유 인권을 부모가 가로채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한 엄마가 프로이트에게 물었다. “정신분석학 개념에 따라 아이를 제대로 교육할 방법은 뭔가요?” 프로이트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원하는 대로 하세요. 어떻게 하든 좋은 방법은 아니니까요.”

눈을 믿지 말라

레무리안2024-01-12

옛 성현들이 누누이 강조한 사항 중에 ‘눈을 믿지 말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눈이 세상 만물에 대해 객관적이고 절대적이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것 때문에 오감이 작동해 욕망이 파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세상에는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고, 많은 것도 없고, 적은 것도 없고,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고, 넓은 것도 없고, 좁은 것도 없다. 눈에 보이는 3차원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본래의 자리를 되찾아 마음의 평화가 시작되는 곳이 딱 한 군데 있다. 그곳이 바로 왼쪽도 아니고 오른쪽도 아닌 지점,...

한계

레무리안2023-12-11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한계를 지닌 존재이다. 생명에도 한계가 있고 신체적 · 정신적 조건에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점 한 가지는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한계는 극복하기 위한 과제일 뿐 불변의 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태어나서 죽음을 맞이하는 일 이외, 모든 조건은 극복의 대상일 뿐이다.

레무리안2023-11-12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하루하루 살아가는 과정은 모두 길을 만드는 여정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길에 대한 경험이다.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두 가지 인생길이다. 누구나 혼자 길을 가지만 그것이 모여 너와 나의 길을 만들고 우리 모두의 길을 조성한다. 내가 걸어온 길이 남이 걷고 싶은 길이 되게 만드는 일, 그것이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다. 그 길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고 오직 인내와 절제를 통해서만 구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걷고 또 걸으며 어느...

글, 나를 거름 삼아 타인의 양식을 만드는 일

레무리안2023-10-01

글은 나를 거름 삼아 타인의 양식을 만드는 일이다. 그것의 이치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글을 위해 자신을 죽이고 스스로 썩어 거름이 되는 과정은 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좌충우돌의 인생 경험과 정신적 내출혈을 거치고도 오래오래 관조하며 침묵하는 가운데 비로소 작은 인생의 굴레를 벗어나 넓은 세상의 양식이 될 수 있는 품성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당신의 걸음걸이

레무리안2023-07-13

사람의 걸음걸이는 천차만별 각양각색이다. 걸음걸이에도 표정이 있고 감정이 있고 인생관이 있다. 지금 그 사람의 걸음걸이는 그 사람의 인생을 압축한 동작이다. 걸음걸이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 곧 인생의 반영이다. 하지만 사람의 눈이 전방을 지향하므로 걸음걸이는 스스로 볼 수 없는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어떤 사람의 걸음걸이는 인생에 대한 체념과 좌절을 반영하고 어떤 사람의 걸음걸이는 인생에 대한 당찬 의욕을 반영한다. 어떤 사람의 걸음걸이는 잘 가꾼 인생의 정원처럼 질서정연하고 어떤 사람의 걸음걸이는...

행복을 부르는 문, 재앙을 부르는 문

레무리안2023-06-12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인생의 씨앗이 된다. 말이 씨가 되어 좋은 결실을 보기도 하고 나쁜 결실을 보기도 한다. 입은 행복을 부르는 문이 되기도 하고 재앙을 부르는 문이 되기도 한다. 입으로 들어가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것에 의해 인생이 좌우되고 운명이 좌우된다. 그래서 경전은 입을 조심하고 남을 비판하는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한다. 남을 향하는 비판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말의 부메랑 효과를 지적한다. 그러니 말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생각하고 그것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겠다. 말이 말을 ...

유행 따라 사는 일

레무리안2023-05-17

유행을 만들고 유행을 따라가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흐름을 형성한다. 그것은 파급력이 강하고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어 유행을 좇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소외감을 느끼거나 본의 아니게 소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평생 유행을 좇으며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유행은 무한 번식력을 지니고 있고 무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어 오래잖아 인간의 내면을 공동(空洞)으로 만들고 황폐한 껍질만 남게 한다. 유행을 추종한 그만큼 자신의 본성과 개성을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루를 잘 사는 것

레무리안2023-04-12

인생을 헛되이 사는 사람들은 하루의 시간 경계를 자각하지 못한다. 어제와 오늘이 다를 바 없고, 오늘과 내일이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무의미한 하루하루의 누적은 죽은 영혼의 늪이 된다. 하루가 모여서 인생을 이룬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인생의 절대적 시공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날마다 되풀이되는 하루는 인생의 압축이고 축약이다. 하루를 잘 사는 것, 그것이 곧 인생을 잘 사는 것이다.

기도와 명상

레무리안2023-03-22

기도는 인간이 신에게 말하는 것이고 명상은 인간이 신의 말을 듣는 것이다.

차이를 극복하는 길

레무리안2023-02-19

차이를 긍정하지 못하면 불평과 불만이 가득해진다. 차이를 존중하지 못하면 증오와 폭력이 난무한다. 차이를 인정하면 간격이 보이고, 간격이 보이면 그것을 메울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리하여 차이는 다름이 아니라 같음을 향한 노정이 된다. 차이가 난다고 사람을 무시하거나 차별하면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불신의 골이 생긴다. 차이를 극복하는 길, 차이를 존중하는 사랑밖에 없다.

달마의 눈꺼풀

레무리안2023-01-23

달마는 소림사에서 9년 동안 정진했다. 그는 더 이상 잠을 자지 않겠다고 서약했고 오랫동안 그것을 지켰다. 먹지도 않고, 웃지도 않고, 눈을 깜빡이지도 않는 수행의 나날. 하지만 어느 날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공든 탑이 무너진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칼을 가져다 자신의 눈꺼풀을 베어내 땅에 묻었다. 그리하여 그의 눈은 더 이상 감기지 않게 되었다. 뒷날, 그의 눈꺼풀을 묻은 곳에서 사람 눈꺼풀 모양의 새순이 달린 관목이 자라났다. 새순을 달여 먹으니 잠이 달아나고 정신이 맑아졌다. 그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