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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 속으로

레무리안2021-12-05

폭우가 쏟아지는 11월의 마지막 날 불현듯 아들과 KTX를 타고 부산으로 갔습니다. 해운대, 자갈치시장, 깡통시장, 국제시장을 거쳐 광안리에 숙소를 잡고 비내리는 밤바다 풍경을 내다보며 간만에 오롯한 휴식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1박2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짧은 시간을 농축한 여행을 선호하게 돼 길게 느즈러지는 여행보다 긴장감을 만끽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하루는 어떤 사람의 일년보다 밀도 높게 농축된다는 것, 시간은 사용자의 사용법에 따라 천의무봉하게 변한다는 것, 날이 갈수록 그런 걸 체득...

퇴계로, 막걸리 성지

레무리안2021-11-19

참으로 오랜만에 퇴계로 나들이를 했습니다. 비가 흩뿌리는 저녁 무렵이었지만 모처럼만의 퇴계로 나들이를 즐기기 위해 약속 장소에 한 시간 먼저 도착해 주변을 산책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약속장소를 찾아갔는데 그곳은 70년대나 80년대 대학가 막걸리집 같은 분위기를 풍겨 여기가 퇴계로 맞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만들었습니다. 메뉴판까지 양은냄비 뚜껑을 이용해 절로 웃음이 났는데 양은 주전자에 내오는 막걸리 맛은 정말 일품이었습니다. 남자 넷이 그것을 몇 통이나 마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퇴계로도 막걸리도 만...

가을 메시지 회람

레무리안2021-11-01

토요일 이른 아침, 누군가 현장에서 찍은 일출 사진을 메시지로 보내왔습니다. 가을 풍경이 물씬한 들판과 산과 골안개가 어우러진 보기좋은 풍경이었습니다. 감사한 마음에 스마트폰 갤러리에서 내가 찍은 가을 사진 두 장을 찾아 그것을 감사의 뜻으로 역시 메시지에 담아 보내주었습니다. 그렇게 가을 풍경을 두 사람만 주고받는 게 아쉬워 한참이 지난 뒤에 다른 사람에게도 메시지로 가을 사진을 보내 주었습니다. 파주 심학산에서 새벽 등산하며 찍은 사진 두 장. 그 사람도 그것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가을 메시지를 보내길 바랐으...

가을이 깊어가는 자리

레무리안2021-10-24

어느 날 밤, 혼자 길을 걷다가 좁은 골목에 아주 작은 LP바가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어두컴컴한 실내, 혼술 하는 남자 손님이 두 테이블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도 병맥주 한 병 꺼내 들고 밖이 내다보이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거기 그 자리에 그렇게 망연하게 앉아서 말들이 붕붕거리는 시간, 동작이 어우러지는 시간, 기운이 뒤섞이는 시간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부질없는 모든 것들이 우주의 정화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걸 자각했습니다. 침묵이 필요한 계절, 가을이 깊어가고 있나 봅니다. 다른 날, 다른 시간에 그...

다시 그곳에 가서

레무리안2021-10-11

연휴에 다시 그곳에 갔습니다. 지난 8개월 정도의 격렬한 작업에 큰 분기점을 만들어 마음에 여유가 깃들 무렵이라 참으로 홀가분한 여행이었습니다. 평생 연휴와 성수기, 주말을 피해 여행을 오가는 체질이었는데 이번에는 일정이 비켜갈 수 없게 짜여져 참으로 오랜만에 사람들이 붐비는 시공간을 경험하였습니다. 코로나로 지친 심신들이 연휴를 맞아 늦은 밤까지 해변에 앉아 있는 걸 보면서 그 주시하는 시선의 이면에서 나름의 판타지를 만끽하는 동안 이박삼일은 쏜살같이 흘러버려 다시, 또다시 아쉬움을 당연시하고 다음을 기약...

다차원 가을

레무리안2021-09-24

이틀 정도 천둥 번개 치고 비바람 휘몰아치는 밤이 지나가더니 그 뒤로 며칠은 하늘과 구름이 참 보기 좋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 모처럼 외출하여 창턱이 유난히 낮고 창이 큰 카페에서 마음 편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물녘이라 하늘빛이 창유리 곳곳에 짙은 색감을 드리우고 있어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은 걸 못내 아쉬워하며 휴대폰으로 창에 드리운 다차원적인 가을 하늘을 잡아 보았습니다. 'Fucking Crazy Summer'라는 문구가 새겨진 민소매 셔츠를 입고 여름 내내 작업에 몰두하던 생각이 떠올...

언택트 시대의 혼술 풍경

레무리안2021-08-30

어느 날, 휴대폰 갤러리에 누적되어 있는 혼술 사진들을 보았습니다. 기간을 보니 4월부터 8월까지, 주로 월요일 밤이었습니다. 월요일 밤 8-10시 줌 강의를 끝낸 뒤, 2차원 평면 강의의 공허함을 술로 달랜 듯합니다. (코로나 이후 이상하게 소주와 맥주를 마시기 힘들어 주로 편의점과 마트에서 산 양주, 와인, 기타 제재주들) 혼술의 필수 요건은 음악과 조명입니다. 최대한 릴랙스하고 싶을 때, 광량을 최대한 줄여야 피로가 풀리고 술이 술답게 흘러들고 음악도 질감을 회복합니다. (아마도 가장 많이 들은 음악은 스팅 Live, 최백호...

광안리 다시 품기

레무리안2021-06-20

참으로 오랜만에 부산 나들이를 했습니다. 출발할 때 수도권의 날씨는 한껏 청명했는데 부산에 도착하니 태풍급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주어진 시간이 아까워 송정과 청사포를 거쳐 밤에 숙소가 있는 광안리에 당도하여 바다 곁에서 맥주를 마셨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맑고 환한 광안리를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동안 숱하게 봐왔던 광안리가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광안리가 되어 나의 품에 안기는 걸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숨어 있기 좋은 곳, 내다보기 좋은 궁창의 광경, 그 모든 것들이 나와...

밤의 정령

레무리안2021-05-10

새벽 두 시 이십분 경, 민트가 거실에서 매우 특이하고 절박하게 우는 소리를 내고 있어 놀란 심정으로 자다 깨어 나가보았습니다. 녀석이 거실의 한곳을 주시하며 한껏 깊어진 바이브레이션으로 두려움이 섞인 괴이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휴대폰으로 그곳을 향해 몇 장의 사진을 찍었더니 이렇게 안개처럼 부연 기운이 일정 부분에 뒤덮여 있었고 첫번째 사진 이후에는 정상적인 피사체로 모든 구조물이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날이 슬슬 무더워지고 납량특집의 계절이 가까워지니 그저 심심풀이 땅콩삼아 상상력 부풀리는 소...

봄빛, 봄볕을 찾아서

레무리안2021-03-31

4월부터 바쁜 스케줄이 시작될 예정이라 긴장하고 있던 터, 봄빛과 봄볕을 만끽할 기회가 생겨 충북 괴산호 주변의 산막이옛길을 트레킹하고 왔습니다. 산막이마을까지 트레킹하고 돌아나올 때는 유람선을 이용해 산길과 물길을 두루 섭렵하며 연둣빛, 녹빛, 진달래, 벚꽃을 보며 지난 겨울의 마음잔재를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 무렵에만 잠시 볼 수 있는 봄빛과 봄볕, 좋은 세상 몰고오는 전령사가 되기를 간절히 빌어 봅니다.

문도선행록

레무리안2021-03-11

2020년 11월 장편소설 『운명게임』을 출간한 이후 4개월, 그동안 집필 때문에 쌓아두었던 책들을 몰아 읽느라 책벌레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대부분 재미없는 책들이었는데 그 와중에 우연하게 기회가 닿아 사진작가이자 행위예술가, 화가인 김미루의 사진산문집을 접했습니다. 도(道)를 물어 선(禪)을 향해 간 기록, 『문도선행록(問道禪行錄)』. 658쪽의 방대한 분량에 사막에서 몸으로 예술한 그녀의 기록이 소름 돋게 옮겨져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책에 저장된 치밀하고 치열한 사막 기록이 저의 사막 경험에 겹쳐져 그동안 해결...

설천봉 메모리

레무리안2021-03-07

2월 말경 무주에 다녀오고 어느덧 열흘. 3월의 첫 일요일을 맞이하여 메인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였습니다. 해발 1,614m의 향적봉에서 주변의 산세를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이 꽤 많았는데 제가 원하는 느낌의 사진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2월의 썰렁한 산빛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산을 찍었는데 산의 느낌이 안 난다는 건 제 기억 속에 각인된 어떤 이미지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사목을 초점으로 시원스럽게 열린 시계(視界)를 찾는 일인데 엉뚱하게도 해발 1,520m의 설천봉으로 내려와 고사목과 스키어를 함께 찍은 한 장...

무주

레무리안2021-02-26

해발 1,614m 무주 덕유산 향적봉에 참으로 오랜만에 올랐습니다. 대학시절, 등산로를 따라 향적봉까지 올라가느라 엄청 힘들어했던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데 그곳은 이제 스키어들을 위한 곤돌라와 리프트 시설이 들어서 고사목 지대의 낯선 풍경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스키를 탈 수 있는 마지막 주간이라 평일인데도 사람이 많았고 눈은 오직 슬로프에만 남아 성큼 다가온 봄기운이 정상에서도 완연하게 느껴졌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금강변에서 어탕국수와 도리도리뱅뱅이라는 것을 먹었는데 여행길에 우정 맛집을 찾아...

별의 사인

레무리안2021-01-29

해발 1,100m의 하이원리조트에서 찍은 별 사진입니다. 지대가 높고 공기가 맑아 밤하늘 별밭이 장관이었는데 개중 가장 밝은 별을 향하여 24-105렌즈를 한껏 당겨 보았습니다. 그렇게 여러 장의 사진을 찍는 와중에 빛의 궤적이 찍힐까 싶어 카메라를 의도적으로 흔들었는데 마치 별이 사인을 한 것같은 사진이 찍혔습니다. 무한대공에 아로새겨진 멋진 별의 사인, 보면 볼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사진입니다.

시공간 짜깁기

b6122021-01-04

지난 연말 어느 날 강화도에 갔었습니다. 강화도, 석모도는 제가 사는 일산에서 멀지 않아 심심찮게 다녀오곤 했는데 신기하게도 조양방직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가 본 적이 없는 게 아니라 그렇게 특이한 공간이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그날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다 알게 되어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1933년 일제 치하에서 만들어진 방직공장이 폐업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2018년에 리모델링해 우리가 지나온 과거를 경험하는 카페로 꾸며졌다고 합니다. 드넓은 시공간을 한바퀴 돌고나면 193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