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우 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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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인생, 약속을 위하여

레무리안2022-10-05

『검색어 : 삶의 의미』에 대한 리뷰가 실린 멋진 잡지를 받았습니다. 글을 쓰신 분이 25꼭지의 책 내용 중 약속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 꼭지에서 느낀 게 많은 듯합니다. 책을 읽은 사람마다 가장 인상 깊었다고 말하는 꼭지가 다른 걸 보면 세상을 살아온 경험이 독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침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관상을 다룬 부분, 즉 운명에 대해 언급한 꼭지를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의 본질에 관해 언급한 부분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떤 독자로부터 의...

알려지지 않은 골목의 매력

레무리안2022-10-02

매주 토요일은 정규 강의가 있는 날이지만 3개월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강의가 없는 주말이라 시월 첫날, 모처럼 점심약속을 잡고 시내로 나갔습니다.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보낸 두 시간 정도 서울이라 믿어지지 않는 한적한 곳에 마음 편히 머물며 주말 인파의 스트레스로부터 홀연하게 벗어나 있어서였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힐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숨겨두고 싶은 골목,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골목. 하지만 인터넷 세상에 그런 곳은 존재할 수 없으니 여기가 어디인지 제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라 믿습니다. 지금까...

추석 대목, 일산 5일장

레무리안2022-09-08

9월 8일 오후, 전날부터 쫓기던 두 건의 작업을 끝내고 5일장이 서는 일산 재래시장으로 힐링하러 갔습니다. 일산 5일장은 3일과 8일에 열리는데 마침 추석 직전의 대목이라 예상 외로 사람이 많이 몰려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는데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시장은 활기를 띠고 있었습니다. 명절 밑이라서인지 전을 파는 가게에 가장 손님이 많았고 각종 해산물과 육류점 앞에도 사람이 많이 몰려 있었습니다. 일산 재래시장 주변에는 작은 차이나 타운이 형성돼 ...

용유도 할리스

레무리안2022-09-04

팔월의 마지막 날, 아침 운동을 끝내고 샤워를 하는 도중 갑자기 용유도의 할리스가 뇌리에 스팟되었습니다. 부랴부랴 노트북과 그날 읽어야 할 책들을 백팩에 담고 길을 나섰습니다. 용유도로 가는 길은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온전히 육감에 의존해 만들어둔 저만의 루트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 길은 현재 어떤 경로로 확인해봐도 내비게이션에 뜨지 않습니다. 그 길을 이용하면 일산에서 출발해 평균 40분 경과 후 눈앞에 펼쳐진 시원스런 바다 풍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가게 되면 인천공항 주변길을 돌고돌...

마지막 관문을 향하여

레무리안2022-08-30

지난 20년 동안 소설창작보다 무지한 분야에 대한 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이리저리 청탁을 사양하고 원하는 분야를 파고들어 인간과 인생의 본질에 대해 적어도 제가 알고자 하는 한 대부분 무지의 영역을 빛의 영역으로 바꾸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것이 곧 무지가 앎의 영역으로 바뀔 때 일어나는 영적 경험입니다. 하지만 딱 한 분야, 주역에 대해서만은 섣불리 파고들지 못한 채 여러 해 동안 책들을 준비해 두고도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공자도 가죽끈이 세 번이나 닳아 끊어지도록 공부했다는 주역, 그러나 아...

신선차 산신냥

레무리안2022-08-23

오늘 새벽에는 비가 내려 산으로 갈까 말까 잠시 망설여야 했습니다. 산행 중에 폭우를 맞은 경험이 몇 번 있었는데 막상 다 젖고 나면 기분이 후련해지던 기억이 되살아나 산으로 갔습니다. 올라가는 동안에는 안개가 많이 끼어 있었는데 운동을 하고 내려갈 때쯤엔 안개가 걷히고 정상 부근의 엄청 큰 바위 상단, 항상 물이 고여 있는 인근에 산신령 포스의 산냥이가 고즈넉한 자세로 앉아 있었습니다. 저 고여 있는 물을 저는 오래전부터 '신선차'라 부르고 이 산의 몇 마리 산냥이 중 저 녀석에게는 '산신냥'이라는 ...

문학평론가 홍정선 교수 별세

레무리안2022-08-22

8월 21일 문학평론가 홍정선 선생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69세의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 지병으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중국에 대해 중국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한국과 중국의 문학적 교류를 위해 혼신을 다해 열정을 바친 사람. 한중작가회의를 10년 넘게 진행하면서 홍정선 선생과 친하게도 지내고 티격태격 의견 다툼도 많았지만 떠나고 보니 그가 차지했던 자리가 유난스레 커 보입니다. 홍정선 선생의 제자인 길림대학교 외국어학부 부학장인 권혁률 선생과 어제 대화를 나누며 그의 족적에 대해 되새겨보았습니다. 저의 사진첩에도 그...

가을을 줍다

레무리안2022-08-18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는 과정을 거치며 근 열흘 넘게 운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운동을 시작할 요량으로 오늘은 새벽 일찍 파주 심학산으로 갔습니다. 지난 비로 등산로가 많이 패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도토리들이 익은 것, 안 익은 것 뒤섞인 채 도처에 떨어져 가을이 온 듯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듯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떨어진 도토리들을 주워 사진을 한 방 찍어주고 다시 정상으로 오르는 동안 문득 잊고 있던 옥잠화가 생각났습니다. 정상 부근에 심어진 옥잠화 군락지는 한여름에 흰 꽃을 피우는데 그 자태와...

난민촌의 또다른 유형

레무리안2022-08-15

제 데스크탑 테이블에 세팅된 카메라 난민촌입니다. 카메라와 렌즈를 보관하는 온습도 조절 캐비닛이 따로 있는데 코로나가 한창이던 언제부터인가 저 친구들은 캐비닛을 떠나 출사의 그날을 기다리며 저곳에서 노숙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데스크탑으로 작업을 하는 동안 그들의 난민캠프가 지척에 있어 위안이 되기도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들도 저도 때를 기다리는 중인데 어쩐 일인지 한번 끊어진 맥은 좀체 부활의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원래 사진을 위한 사진을 싫어하고 인연 따라 찍는 걸 좋아해서 특별한 ...

호캉스의 새로운 버전

레무리안2022-08-11

병원에 입원하여 생명에 대한 경건함, 삶에 대한 감사함을 일깨우는 일종의 정신 재무장 시간으로 저는 지난 며칠 동안 병원에서 호캉스(Hospital Vacance)를 했습니다. 매번 동일한 복통과 격통 패턴으로 응급실로 실려가 온갖 정밀검사를 다 받지만 결국엔 모든 증상이 소멸되고 사오일 정도 지난 뒤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기이한 판정을 받고 퇴원합니다. 지난 15년 동안 거의 3년에 한 번씩 되풀이되는 미스터리한 힐링코스입니다. 의사들도 끝내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퇴원을 시키지만 저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

동일한 순간은 재현되지 않는다

레무리안2022-08-05

7월 25일 밤 11시경, 아파트 단지 옆에 있는 공원으로 나갔습니다. 등나무 벤치에 앉아 앞을 내다보니 건너편 주상복합아파트가 환상적인 마천루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다음날 다시 메인 카메라를 가져와 찍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틀 뒤, 거의 같은 시간대에 카메라를 가지고 공원으로 나갔는데 어쩐 일인지 이틀 전의 그 선명도, 구도, 몰입감이 전혀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이리저리 위치를 바꾸어봐도 도무지 사진이 될 가능성이 없어보였습니다. 결국 메인 카메라 작업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결정...

인사동 경인미술관

레무리안2022-07-28

수요일, 인사동 근처에서 여섯 시에 약속이 있었습니다. 집에서 나갈 때 이미 인사동 구경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니RX100도 챙기고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막상 약속 장소에 당도하고 보니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인사동을 느린 걸음으로 주유할 여유는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걸음이 경인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코로나 이후 처음 발길이 닿은 인사동, 오랜 갈증을 해소한 듯하지만 아직 아쉬움이 남아 조만간 다시 한번, 인사동 느리게 걷기를 할 작정입니다.

구효서의 꽃다발

레무리안2022-07-26

7월 23일, 구효서의 소설집 『세상은 그저 밤 아니면 낮이고』와 저의 에세이집 『검색어: 삶의 의미』 출간 기념 리뷰어와의 만남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구효서와 저는 똑같은 꽃다발을 하나씩 선물 받았습니다. 행사가 다 끝나고 자정이 지난 시각 집에 도착해 끝까지 챙겨온 꽃다발을 해체하고 그것을 화병에 담아 민트의 캣타워 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꽃다발을 해체하는 과정에 작은 카드가 하나 나왔는데 의례적으로 꽃아주는 축하카드일 거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꽃다발 정리를 다 끝내고 무심결에 그 작은 카드를 꺼내...

7월 23일 밤 11시 44분

레무리안2022-07-24

토요일 밤에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행사 끝내고 집에 가기 위해 차를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가만히 조망하자니 우중포차가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포차에 앉아 빗소리 들으며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표정에 생기가 돌고 왁자하고 방만하게 주고받는 대화에도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우중풍경의 뒷전에 앉아 가만히 주변을 조망하는 짧은 시간이 사진보다 더 강한 인상을 기억에 남겼습니다. 종로3가 전철역 6번 출구, 요즘은 거기가 제 일상 무대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입니다.

새벽의 민트

레무리안2022-07-14

새벽 3시 30분, 민트의 정갈한 표정입니다. 명상 준비를 하는 집사 옆에 저렇게 앉아 있다가 작은 스탠드 불빛마저 소등되고 나면 조용히 옆에 배를 깔고 엎드려 지킴의 자세를 취합니다. 가족이 된 지 9년이 지나고 나니 이제 저 존재가 없는 집안 풍경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가족의 일원이라는 걸 저도 분명하게 인지하는 듯 나이가 들어갈수록 믿음직스럽고 깊은 신뢰감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집사는 자주 민트에게 이렇게 속삭이곤 합니다. "민트야, 다음생에는 꼭 사람으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