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23 13:49, 3801 Wengen, Jungfraujoch, Switzerland
오래 전 「융프라우 현상학」이라는 단편소설을 쓴 적이 있습니다.
2천년대 초반에 쓴 것이 아닌가 싶은데
서가에 책이 없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인형의 마을』이라는 소설집에 그것이 수록돼 있었습니다.
인터넷에 올라 있는 글들을 보니 그 소설집에 무서운 여성성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었는데
설마 내가 그런 소설들을 썼을까? 싶을 정도로 섬뜩한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야생동물 이동통로」가 그랬고,
「융프라우 현상학」에도 다음과 같은 부분이 인용으로 올라와 있었습니다.
(전략) 그런 와중에 어느 날 갑자기 미향이 집으로 쳐들어왔다. 그리고 팬티와 러닝셔츠 차림으로 좁은 아파트를 어정거리는 나를 앙칼진 도둑고양이처럼 덮쳤다. 다짜고짜 민소매 셔츠와 반바지를 벗어던지고 돌진하는 그녀에게서 나는 칼날처럼 번득이는 광기를 보았다. 나는 그녀가 나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며 재빨리 뺨을 후려쳤다. (후략)
-박상우, 『융프라우 현상학』 中
기억이 선명해져 되짚어보니 그 단편소설은 청평댐 안쪽의 산길을 운전해 가다
길옆에 있는 '인터라켄'이라는 펜션 이름을 보고 착안,
융프라우에도 가보지 못한 채 상상만으로 쓴 소설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융프라우에 올라 직접 느낀 것은 한 가지
'그것은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들여다보는 것'이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무엇이든 시간이 지난 뒤에는 그렇게 된다는 걸 알게 해 준 융프라우,
우리 모두 하나의 큰 이야기 속에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걸 알게 해 준 산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