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 동안 소설창작보다 무지한 분야에 대한 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이리저리 청탁을 사양하고 원하는 분야를 파고들어
인간과 인생의 본질에 대해 적어도 제가 알고자 하는 한
대부분 무지의 영역을 빛의 영역으로 바꾸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것이 곧 무지가 앎의 영역으로 바뀔 때 일어나는 영적 경험입니다.
하지만 딱 한 분야, 주역에 대해서만은 섣불리 파고들지 못한 채
여러 해 동안 책들을 준비해 두고도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공자도 가죽끈이 세 번이나 닳아 끊어지도록 공부했다는 주역,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것의 끝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주역.
주역을 점술 관련 분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것이야말로 무지의 소산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자역학의 대부라 불리는 닐스 보어가 역경을 읽고
양성자-전자-중성자로 이루어진 원자모델을 발표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이진법의 디지털 이론도 역시
음양의 근본 원리를 지닌 주역의 기본 개념을 바탕으로 한 것일 뿐 아니라
프랙탈 구조와 유전자 구조까지도 역경의 범주에 속한다고 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주역의 근본원리가 물리학에서 찾고자 하는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과 맞닿아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려나 이 눈치 저 눈치 보던 주역의 영역을 파고들 계기가 주어졌는데
최근에 도올 김용옥 선생이 드디어 780페이지 분량의 주역강해를 출간한 때문입니다.
도올 선생이 평생 파고든 동양학 저술의 마지막 지점이 이 책이 아닐까 싶은데
선생의 학자로서의 면모에는 엄청난 존경의 염을 품고 있지만
그의 정치적 간여에 대해서는 중용의 도를 상실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학문은 학문, 처신은 처신으로 분리하여 도올 선생의 주역 강해를 품기로 하였습니다.
중국의 왕필과 남회근을 비교하며 파보는 재미가 쏠쏠하겠지만
이 어려운 분야에 파묻혀 얼마나 긴 시간이 흘러갈지 지레 걱정이 되는 바입니다.
하지만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다면 '학이시습 이타행보學而時習 利他行步'의 제 평생 좌우명대로
여러 사람들과 그 결실을 나누어 인생의 자양분이 되게 하고 싶습니다.
가을비 내리는 날, 먼 길 떠나는 기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