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감

레무리안2019-02-15 

아침마다 거실 베란다 창 앞의 전나무에 참새들이 떼지어 찾아옵니다. 베란다 문을 열 때까지 목화덩어리처럼 나무에 앉아 있다가 컵에 쌀을 담아 투척하면 일제히 내려앉아 신나게 아침을 먹습니다. 참새들은 너무 민감해서 날아오르고 내려앉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며 낱알을 쪼아먹습니다. 뿐만 아니라 탐욕을 부리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먹고 날아가 다른 참새들에 대한 배려가 생리적으로 작용하는 걸 확인하곤 합니다. 작업실 창 앞에는 붉은 열매가 가득 맺힌 산수유나무가 있어 이곳에는 직박구리...

밤에 받은 편지

레무리안2019-02-04 

작가들과의 모임을 마치고 늦은 밤에 귀가했을 때 식탁 위에 국제우편이 놓여 있었습니다. 배낭을 메고 먼 타국을 돌고 있는 후배 소설가가 보내온, 참으로 오랜만에 받아보는 손편지였습니다. 그것을 읽고 울컥, 나도 모르게 눈두덩이 욱신거려 (깊은 밤의 정서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이런, 이런, 하는 탄식을 나도 모르게 연해 터뜨렸습니다. 홀로 외롭고 긴 여정을 견딜 때 밀려오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지나간 시간성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의 형상들, 그런 것으로 그는 악필을 무릅...

1월

레무리안2019-01-16 

함백산 등정을 하러 갔다가 눈이 전혀 내리지 않은 백두대간의 살풍경에 진저리를 치고 차를 돌려 삼척으로 내려가 바다를 보고 왔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들른 추암(湫岩), 전망대로 올라가자마자 예사롭지 않은 장면이 단박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촛대바위에 의연하게 서서 늦은 오후의 양광을 받고 있는 갈매기 한 마리,  그것에 기막힌 상징성이 숨어 있는 것 같아 장망원 렌즈를 장착하고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직 저 갈매기 한 마리와 만나기 위해 태백-함백산-삼척을 거쳐 촛대바위 ...

長春에 대하여

레무리안2019-01-16 

이 한 장의 흑백사진에 많은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2017년 10월, 중국 길림성 장춘시를 방문했을 때 찍은 것인데 시간과 공간, 그리고 제한적인 움직임들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일들을 경험하였습니다. '장춘'이라는 지명은 한자로 '長春'으로 표기하여 '긴 봄'이라는 의미가 되지만 실제로는 겨울이 너무 길고 봄이 너무 짧아 붙여진 반어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긴 겨울을 견디며 긴 봄을 꿈꾸는 마음, 한 장의 사진을 보며 동토(凍土)와 해토(解土)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

마음의 일출

레무리안2019-01-01 

새해가 밝았다고 사람들은 인식합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사람들은 인식합니다. 그래서 공간 이동을 하여 곳곳으로 일출을 보러 갑니다. 모든 것이 아무런 의심없이 습관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일출 장면은 장엄하지만 그것이 세상 도처에서 목격되는 것처럼 실재적인 것일까요? 외부세계로 인식되는 모든 사건이 실제로는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상(心象)이라는 뇌과학적 견해는 낯설고 생경하지만 그것은 이미 4세기경 불가(佛家)에서 창출한 유식사상(唯識思想)의  '일체유...

낙조

레무리안2018-12-31 

12월 중순, 한 해를 정리하는 의미로 서해 낙조를 보러 갔습니다. 을왕리해수욕장 끄트머리에 있는 방파제로 가면 언제나 해가 지는 풍경을 볼 수 있어 오랜만에 그곳으로 갔습니다. 해가 지는 풍경, 해가 진 뒤의 풍경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어 생사의 대조처럼 서늘한 기분을 느끼게 했습니다. 노을은 언제나 가볍게 보이지 않고 인생처럼 쓸 데 없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떠오른 한 편의 시가 있었습니다.     너무 무거운 노을   김명인   오늘의 배...

2018년을 정리하며

레무리안2018-12-30 

20180705 19:56, Gardens by the bay, Singapore   2018년을 하루 남겨 둔 마지막 일요일, 지난 일년 동안의 족적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구글 포토에 산적한 사진들을 정리하고 휴대폰에 저장된 숱한 메모들을 정리해 폴더로 옮기고 지나간 달력을 훑어보며 주요 사항들을 기록하는 등등의 일.   구글 포토를 정리하다 지난 여름 싱가포르에 갔을 때 Gardens by the bay에서 'Supertree Show'를 찍은 동영상을 발견했습니다. 공원 바닥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찍은...

시간이 존재라는 생각

레무리안2018-12-29 

며칠 전 사진 정리를 하다가 한겨울의 빛축제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2011년 12월 29일,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7년 전 오늘의 사진이었습니다. 저 사진이 제게는 너무 낯설게 보여 충격적이었는데 사진의 어느 구석에서도 저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존재는 '나'라는 망상이 아니라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점선면으로 이루어진 3차원이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이 되려면 반드시 시간이라는 차원이 레일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면 3차원은 정...

문장의 소리

레무리안2018-12-13 

 <문장의 소리> 제559회 : 박상우 작가의 『소설가』편 https://munjang.or.kr/archives/278807   인터넷 문학 라디오 <문장의 소리> 559회 녹음은 12월 5일 홍대앞 녹음실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소설가 해이수님과 조해진님이 진행과 연출을 맡고 시인 정현우님이 구성을 맡는 독특한 컨셉의 문학방송입니다.  예술위원회 관계자와  방송 진행자들의 진지하고 정성스런 자세를 경험하며 매우 독특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시인과 소설가들이 전문...

Question Reality

레무리안2018-12-07 

영화 '13층(The Thirteenth Floor)'의 포스터입니다. SF의 전설이 된 '매트릭스'와 같은 해(1999)에 나온 영화입니다만 '매트릭스'에 대한 폭발적 반응에 가려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다소 낡고 구태의연하게 느껴지는 영화적 서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제기하고 있는 세상의 실재성에 대한 질문은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많은 여운을 남깁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비실재성에 대한 얘기는 과학분야로 넘어가면 모든 물질의 내부가 99.9% 비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스크린X : 보헤미안 랩소디

레무리안2018-11-26 

프레디 머큐리 덕분에 난생 처음 스크린X 관을 경험했습니다. 공연 장면들이 3면으로 펼쳐질 때는 라이브 공연의 실감이 완연하게 살아났습니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제가 팝의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 노래인데 7, 80년대를 풍미한 퀸이 21세기에 다시 부활해 여러 히트곡들이 도처에서 재생되는 게 신기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영화가 정말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고 영화를 관람하던 날의 흥감이 잦아드는 게 못내 아쉬워 집으로 돌아와 소장하고 있던 그들의&...

11월

레무리안2018-11-22 

20181119 08:05 심학산     11월   박용하     한 그루의 나무에서 만 그루 잎이 살았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길상사

레무리안2018-11-18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법정     지켜보라. 허리를 꼿꼿이 펴고  조용히 앉아 끝없이 움직이는 생각을. 그 생각을 없애려고 하지도 말라. 그것은 또 다른 생각이고 망상일 뿐. 그저 지켜보기만 하라. 지켜보는 사람은  언덕 위에서 골짜기를 내려다보듯 그 대상으로부터 초월해 있다. 지켜보는 동안은  이렇다 저렇다 조금도 판단하지 말라. 강물이 흘러가듯 그렇게 지켜보라. 그리고 받아들이라. 어느 것 하나  거역하지 말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

두 편의 영화

레무리안2018-11-14 

11월 들어 본격적으로 작업에 몰두하면서 머리가 지끈거리고 휴식이 필요할 때마다 영화를 한 편씩 봅니다. 좋은 영화 한 편을 보며 두어 시간 휴식을 취하는 일은 며칠 동안 여행을 다녀온 것보다 강한 환기력을 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영화가 범람함에도 불구하고 좋은 영화를 가려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검증 받은 영화, 추천 받은 영화를 보곤 하는데 [욕망의 대지(The Burning Plain)]와 [체인질링(Changeling)]은 이리저리 검색 과정에서 찾아...

가을 채집

레무리안2018-10-31 

가을의 몇날 동안, 미구에 닥쳐올 집필에 대한 긴장감을 등에 업고 이리저리 단풍과 낙엽을 따라 동선을 만들어보았습니다. 산과 사찰의 낙엽과 단풍, 폭우와 뇌성벽력이 지나가던 날의 아파트 단지, 어떤 시인의 행보를 뒤에서 밟아보기까지, 가을은 앞에서도 뒤에서도 아니고, 옆에서도 위에서도 아니고 저홀로 내밀하게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한없이 화려하고 선명한 색감에 물들어 잔잔한 가슴 한구석에서 자진모리가 터져나올 듯한 만추입니다.